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 나오스케 (문단 편집) == 평가 == 이이 나오스케를 두고 일본인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결정해 일본의 역사를 바꾼 뛰어난 정치가라는 평,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잔인한 권력자라는 평이 엇갈린다. 또한 과연 이이 나오스케가 정말로 개항론자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방편으로 개항론을 선택했고 막부의 실권을 회복한 뒤에는 다시 양이를 실행하려고 한 게 아니냐고 지적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사후 자택의 서재에서 다량의 세계지도와 서양서적이 발견된것을 들어서 이이 나오스케가 부국강병이란 입장에서 서양과의 통상교류를 선택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지방 행정에 관한 능력은 히코네 번에 있을 때 번정개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충분히 입증되지만, 중앙의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고 대립갈등을 빚었던 것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번주의 후계자로 지명되기 전까진 여러 가지 취미생활로 풍류를 즐겼고 무예에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검술, [[거합도]], 창술, 포술, 유술([[유도]]) 등에 능했고 [[거합도]]는 신심류를 배워서 자신만의 새로운 유파 신심신류를 열었다고 한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에서도 미토 번 가신들이 쏜 총[* [[콜트 리볼버#콜트 1851 네이비|콜트 M1851]] 네이비의 일본제 복제품]에 맞지만 않았다면 거합도로 위기를 벗어났으리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 사쿠라다문 밖의 변이 나기 그날 아침 '미토 번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디 주의하라.'는 투서를 받았지만,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암살경고 투서를 받은 적이 있었고, 암살 시도를 당한 적이 있었다. 이런 일로 경호 인원을 늘리는 것은 전례가 없었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큰 실책이었고 결국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말년의 회고록에서 "재략은 부족하나, 결단력 있는 인물(才略には乏しいが、決断力のある人物)"이라고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